me telling the stories

나를 믿어주는 곳은 어디입니까?

yyva 2010. 10. 14. 07:40


런던 금융의 중심지 Canary Wharf


얼마전 컴퓨터가 고장나 결국포맷을 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지갑을 잃어 버렸습니다.

데이터 백업도 되어 있었고,
지갑속에는 별로 중요한 것들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찰나,
인터넷 뱅킹으로 돈을 송금하려니 공인인증서가 온데간데 없고,
그제사 은행의 보안카드들이 다 지갑속에 있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외국에 있는지라 한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받아올수도 없고 발을 동동 구르는데,
얼마전 영국에서 받은 학생증이며 여러가지 증명서를 스캔한다고 푸닥거리던 남편이
보안카드들까지 다 스캔을 떠 놓았답니다. 식은 땀이 사~악하고 식는 기분이었습니다.

보안카드가 한국에 있는 가족들 보다 쓸모있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누군가 나의 일들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일테지요.
특히 모두가 떠받드는 돈문제에 관해서는 그 무엇보다 '서류'와 '기록'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이 신용을 만들어 주고, 계좌주인의 정체성을 설명해 주고 있으니까요.
나의 진심어린 전화한통보다 공인인증서와 보안카드가 나를 설명하는데 더 효과적입니다.

심지어 남편과 아내, 부모의 관계도 '서류'가 인정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도장, 지문, 홍채, 사인된 편지 한장이 나의 말 한마디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대신'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많은 절차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내가 누구누구 엄마인데요, 남편인데요.. 하는 관계로는 이제 아무것도 그 누구를 '대신'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들의 진심어린 설명보다 서류한장이 나와의 관계를 알려주는데 더 효과적입니다.

얼마전 영국의 렌트이야기를 하다가 보증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수백에서 수천의 외국 학생들이 런던에서 생활을 하는데,
몇몇 안타까운 사정의 학생들(분명 안타까운 사정이 있어서 집세를 내지않고 출국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ㅠㅠ;) 때문에 많은 다른 학생들이 예전과는 다른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내가 돈을 잘 내겠다고 아무리 안심을 시켜도 소용이 없습니다.
제 말은 그저 이방인의 '말'일 뿐이니까요. 
보증인이 사인한 서류가 나의 진심어린 말 한마디보다 효과적입니다.

핸드폰 계약을 하는데도 내가 앞으로 돈을 잘 낸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나의 약속과 다짐은 아무런 힘이 없는 허공속에 떠도는 '단어들의 조합'일 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증금을 더 냅니다. 이 나라는 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여기서 살았던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나의 진심어린 약속보다 내 신용을 높여주는데 효과적입니다.

'혹시 모르니까' 서로 불편하더라도 돈관계는 문서로 남기고, 서로 사인을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합니다. 
그냥 사람좋아서 믿는 사람들은 '순진하고' '아둔한' 또는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로 낙인 찍히기 일쑤 입니다.

그래서 더 나의 약속을 믿어주고, 나의 말 한마디에 무게를 실어주는 곳, 사람이 그리운가 봅니다. 
낯선 나라에 오니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을 만한 세상은 어디있습니까?